
고 페레올 주교가 피신했던 곳
박해 후 한국 천주교회의 참상(慘狀)/신임 교구장 페레올 주교
1839년에 시작된 대박해는 1841년에 이르러서야 종막을 고하고 종교의 평화도
차차 회복되었다.그러나 눈 닿는 곳마다 이 얼마나 참담한 광경이냐?교우촌은
송두리째 뒤집혔고 수천의 천주교 신자는 몸 붙일 곳도 잃었으며 벌이도 없이
가족은 칼과 오라와 귀양 혹은 기아로 가장을 여의고 사면 팔명으로 흩어졌다.
아이들은 아비지를,찾고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식들을 찾아 다녔으며 많은
처녀들은 포종들에게 강탈당해 외교인들 틈에 숨어 부끄러운 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기막힌 설움을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교우들은 거의 모두가 곤궁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도 살아야만 했으므로 그
조상들이 1801년 박해 후에 했던 것처럼 산골로 피해 들어가 약간의 황무지
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하느님의 섭리는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고, 또한 외교인들도 그들의
정직함을 아는 만큼 새로 이사해 온 그들에게 돈과 종자를 꾸어 주어 죽음
은 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비참한 경우를 당하고, 또 신부는 한 명 없으면서도 사도적 사업은
중단되지 않고 진행되었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 현석문, 모방 신부의 정 베드
로, 이승훈의 손자로 아내가 죽은 후부터 앵베르 주교의 복사가 되었던 이재
용(이 토마스) 등 선교사들의 신임을 받던 교우 세 명이 포졸들의 수사망을
벗어났는데, 이들은 용감하게도 교우들의 신앙을 다시 일으키고 종교 절차를
재건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한편 외방 전교회에선느 회원 세 명이 피를 흘려 물들인 이 땅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1808년 보클뤼즈(Vaucluse)의 퀴퀴롱(Cucurron)에서
출생한 페레올(Ferreol, Jean Joseph 高) 신부가 파견 되었다.
새로 임명된 이 사도는 1840년 마카오에 상륙해 몇 주일 후에는 외교인의
정크(중국 특유의 운송용 범선)를 타고 복건성(福建省)으로 건너가 그곳
에서 호북(湖北)과 직예성(直隸省)을 거쳐 만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봉천
(奉天)까지 와서는 그 이상 갈 수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몽고(蒙古)로
되돌아갔다.
2년간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페레올 신부는 몇 번이나 중국인 회장들을
한국 국경으로 보내 해마다 서울에서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
이 지나갈 때에 한국 교우를 만나 연락을 취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계획
은 매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심부름꾼들은 편지도 받지 못하고 보행
꾼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한국 교우들도 선교사들과 연락을 다시 맺으려고 노력해 1840년에는
한 교우가 국경을 향해 떠났다가 도중에 죽었고, 이듬해에도 다른 교우가
국경까지는 갔었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1842년 세 번째로 길을 떠난 교우(김 프란치스코)가 다행히 페레올
신부와의 대면에 성공했던 것이다. 페레올 신부는 벨리나(Bellina)좌 주교
로 축성되어 한국 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기회에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아래와 같은 매우 훌륭한 편지를 보냈다.
박해를 당하고 모욕을 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천주의 복된 가족으로서
이 세상에서 차지할 몫이 한국 교회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습
니다. 카프사 주교가 세상을 떠나며 미구에 한국 민족이 복음의 산하에 모
여들 것을 바란다고 한 그 희망이 실현되기를 천주께 기도합시다.
이와 같이 많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을 것이요, 우리 묵은 유럽
에서 그러했음과 같이 이 처녀지에도 그것이 새 교우의 씨가 될 것입니다.
세속은 비록 그 재물과 쾌락을 가지고 할지라도 우리가 갈망하는 지위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런 매력을 그 추종자들에게 느끼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국과 부모와 친우를 떠나 4, 5만 리 밖에 와서 사람의 도움도 없고
보호자도 없이 풍속과 언어가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거의 의지할 곳도 없이
법에 의해 추방당하고 못된 짐승처럼 물리며, 가는 곳마다 곤란밖에 당하는
것이 없고 눈앞에는 참혹한 죽음ㅇ르 당할 가망밖에 보이지 않는 가련한
전교 신부가 두 명 있으니 확실히 이 세상에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
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귀양살이의 동무가 되기 위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천주 성자께서는 우리가 받는 노고에도 무한한 기쁨을 주시며
그를 사랑하고 버림을 받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가족과 친우
를 떠남으로써 희생한 위안을 백 배로 늘려 우리에게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마치 품팔이꾼같이 고된 그날그날을 보냅니다마는 이 날이
끝난 다음에 우리가 받을 갚음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그지없이 즐겁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아아! 십자가의 어리석음에서 지혜를 찾지 않는 세속
의 지자(智者)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페레올 주교의 축성식은 1843년 12월 31일야 거행되었고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45년 10월이었다. 그러나 슬프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되어 박해가 다시 일어나 주교를 제2의 고향으로 인도해 들였던 최초
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이 가장 빛나는 희생으로 쓰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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