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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2-15 20:45
[일반] 대림3주 특강 (신앙속의 그리스도)
 글쓴이 : 김스테파노
조회 : 4,838  

강 사 : 곽진상 신부 수원가톨릭대 교의신화

일 시 : 2009.12.15(화) 20:00 ~ 21:30

주 제 : 신앙속의 그리스도


- 대림 특강(3) -

신앙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곽진상(제르마노) 신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스도(주님, 구원자)로 고백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에 이를 수 있을까?

1.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우리에게 보도해주고 있다.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록하여 보고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역사서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목격한 이들이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이 아들이심을 밝히며, 그분의 생전의 말씀과 행적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고백서이다.

이 신앙고백서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이 구세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교 탄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특히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자신이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다(1코린 15,3-8).

2. 부활은 구원사건이다.

부활을 성령의 은총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구원 사건으로 논하지 않는다면, 부활을 논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사실(fact)이 아니라 의미를 주는 사건(event)이다. 부활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신앙은 어떤 객관적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성적 명증성)이 아니라, 사건 앞에서 사건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이 사랑에 대한 전인적인 결단이요, 일종의 입장표명이다.

3. 부활사건은 신앙 안에서만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부활은 초기의 불신을 극복한 신앙 안에서만 ‘목격된 것’이 분명하다. 가장 합리적인 것은 제자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믿었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언자의 비참한 역사를 설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4. 부활의 진실성과 부활신앙과의 관계

우리가 어떻게 부활 신앙의 진실성을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유비를 상정해야한다. 흔히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 실제의 사실 자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나 인식론적으로 우리는 순수 사실(fait brut)을 알 수 없다. 사건은 항상 목격자에 의해 전해지고, 목격자는 자신의 전이해에 따라 전해준다. 이 프리즘을 통한 인식은 이미 순수 사실에 해석이 가미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활이라는 사실이 먼저 있었고, 그에 대한 믿음이 나중에 생겨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부활 신앙 안에서, 부활 체험 안에서만 부활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오로지 부활신앙을 통해서만 부활의 진실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이 신앙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루카 16,19-31 참조).

둘째,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은 실존적 변화를 유발시키는 은총의 사건이다(루카 24, 13-35 참조).

따라서 오늘날 부활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바로 우리의 눈을 열어줄 수 있었던 말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을 되살리시는 하느님의 세상으로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게 했던 그 말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적인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은 오직 말씀에 대한 믿음(‘들음에서 오는 신앙, fides ex auditu’) 때문일 뿐, 부활하신 분의 발현을 목격한 증인들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들려주는 사화들의 진정성을 확신했기 때문도 아니다.

5.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혼란에 빠트린다.

실제로 예수님의 메시지와 행동은 그 대상자들이었던 “가난한 사람들과 하층민들”에게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은총으로만 사는 것은 그리 바랄만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마태 18, 23-35). 예수님의 행위를 특징짓는 죄인을 수용하는 자비로운 태도도 우리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간음한 여인과 성실한 여인이 넘치도록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눈에 별 차이가 없다면, 유산을 낭비한 아들과 아버지 재산에 이익을 남긴 아들을 아버지가 똑같이 자애로 바라본다면, 그리고 젖을 내는 양과 뛰어다니느라 힘을 낭비하는 양이 있다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겠는가? 아침 일찍 고용된 일꾼들이 하루 종일 힘겹게 일하고 나서 오후 늦게 고용된 일꾼들과 똑 같이 대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정말로 잘못된 것일까?(마태 20, 1-16)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힘든 무엇이 있다. 그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요,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순을 해결하는 길을 제시해 준다.

6.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킨다.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병자를 치유해 주시며,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던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행했다는 이유로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십자가상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동안의 말씀과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어졌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고,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했다면, 사랑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갈망하기에는 불확실한 것으로 드러난다. 즉 사랑하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앞에서, 그 누가 사랑하는 것이 믿을 만한 삶의 이상(ideal)이라고, 관심과 신뢰를 가질만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부활에 대한 케리그마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구원하셨다.”고 덧붙인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앙은 은총의 말씀을 짓누르는 의구심을 하느님께서 없애 주셨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것은, 의로운 처형자의 운명이 불가피하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에 지배되도록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지 말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이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역설적인 아름다움에서 감동을 받도록 초대한다. 인간적인 관점에 볼 때,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마음을 뒤흔들고 사로잡는 강렬한 아름다움이 발산된다. 실제로 당신 자신에 대한 걱정도 없이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그 사랑 속에는 빛을 발하며 평화를 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기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음을 보았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극명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하느님께 신뢰하는 이유는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 때문이다. 오늘날 부활하신 분은 살아 있는 말씀으로, 그리고 성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의 말씀 앞에서, 그분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입장표명해야 한다. 그 사랑의 진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나의 관점으로 회피할 것인지.


김요셉 09-12-1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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