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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4 20:52
또 다시 성 목요일에
 글쓴이 : 가로등2
조회 : 11,092  

또 다시 성 목요일에

 

과거 유다 문화 안에서 ‘세족’(洗足)은 노예 가운데서도 몸종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기후는 건기의 여름과 우기의 겨울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덥고 건조한 여름의 경우 바깥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먼지와 땀으로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귀가 시간에 맞춰 몸종은 주인의 발을 씻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종은 주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허리를 굽혀 먼지투성이의 발에 물을 붓고 뽀득뽀득 씻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정성껏 발의 물기를 닦곤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 ‘세족은’ 철저하게도 노예에게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노예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이 스승이자 주님이신 당신의 발을 씻겨드려야 마땅한 데 오히려 반대로 당신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뜻밖의 시추에이션에 깜짝 놀란 제자들이 이러시면 곤란하다며 적극 제지해보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메스컴을 의식해서 적당히 포즈만 취하고 마는 그런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먼길 떠나기에 앞서 당신께서 극진히 사랑했던 제자들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며 정성껏 뽀득뽀득 씻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행동, 당신의 본심을 말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들의 일이었던 세족(洗足)을 하느님의 일인 세족례(洗足禮)로 승격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세족례를 통해서 이제 세족은 노예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몸종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한낱 피조물이며 죄인들인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들의 삶을 한번 돌아봅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어른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라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어른일수록 연장자일수록 먼저 인사하며 다가서야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회장인데, 내가 상급자인데 하고 뻐겨서도 안되겠습니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봉사하고 더 기쁘게 궂은일에 소매를 걷어붙여야겠습니다. 정치인들 4년에 한번만 앞치마 두를 것이 아니라 매일 앞치마를 두르고 연탄배달 봉사를 나가야겠습니다. 사제라 할지라도 원장이라 할지라도 환한 얼굴로 마당도 쓸고 설거지도 해야겠습니다.

 

세족례는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오늘 성 목요일은 참으로 복된 밤이며 은혜로운 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갓 피조물인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신 복된 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 그 깊은 겸손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성 목요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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