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안신부
“나환우의 사도”, “몰로카이의 성자”, 또는 “현대 구라 사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다미안 드 베스테르Damien de Veuster 신부는 1840년 벨기에의 농촌 마을에서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아버지 프랑스와 드 베스테르와 어머니 가타리나 사이의 여덟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1월 3일에 세례를 받고 요셉 드 베스테르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성실한 신앙인이어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는데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을 매일 자녀들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도 농부가 되기를 바랐지만 요셉은 수도 사제가 된 맏형과 수녀가 된 두 누나의 영향을 받아 점점 수도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하는 부모님, 이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니 저는 순명해야겠습니다.” 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로써 부모의 허락을 얻고는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했다. 먼저 들어간 큰형의 환영을 받으며….
그는 매우 건강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수도생활에 잘 적응했으며, 의사로서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303년경에 순교한 다미안 성인을 수도생활의 주보성인으로 삼아 수도명을 다미안(희랍어로 ‘말을 길들이는 사람’ 의미)으로 정했다. 사제가 되기 위해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신학 과정도 공부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신학 공부보다는 선교활동을 하고픈 열망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다미안이 속한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성심을 공경하면서 성체께 대한 찬미와 흠숭을 드린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해외 선교활동을 하는데 1825년부터는 하와이 군도(편집자 주. 일명 ‘샌드위치 군도’라고 하며 크고 작은 1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1893년까지 왕조가 지속되다가 그해에 일어난 혁명으로 공화국이 되었고 1898년에 미국의 주권 하에 놓였으며 1959년에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미안이 부제서품을 받은 1863년에 하와이에서 선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그에 따라 신부와 수사 6명과 수녀 10명이 선발되었고 그들 중에는 다미안의 형 팜필 신부도 끼어 있었다.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다미안은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출발 전날이었다. 그의 형이 그즈음 번지고 있던 장티푸스에 걸려 출발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재빨리 장상에게 간청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마침내 23세의 다미안은 그해 11월초에 ‘R. M. 우드’호에 올라 이듬해 1864년 3월 19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에서의 선교
그는 5월 21일에 호놀룰루에 있는 평화의 모후 성당에서 두 동료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선교활동에 나섰다. 그는 배를 타고 하와이 군도 곳곳을 다니면서 이교도인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틈틈이 그들의 언어를 배웠다. 선교를 위해서나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서 언어는 필수였다.
그의 사목지에는 주민의 수가 2천 명 정도였는데 그중 신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성적으로 문란했으며 미신이 팽배해 있어 병이 나면 짐승을 바쳐 제사를 지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태평스런 성격과 튼튼한 몸집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목수 일에도 능한 점을 십분 발휘하여 원주민들과 동고동락했다. 그리하여 성당, 학교, 집, 축사 등을 지어주고 가축 사육도 마다하지 않으며 섬사람들을 도왔다. “1년에 한 채 꼴로 성당을 지었다.”
당시의 주교는 이렇게 증언했다. “원주민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서너 사람이 함께 들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을 크기의 통나무를 다미안 신부 혼자서 거뜬히 들어 나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들은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탄성을 지르곤 했다.”
한편 하와이 군도에 대륙의 사람들이 무역이나 선업 등으로 드나들면서 장티푸스, 콜레라, 매독과 같은 각종 전염병이 전파되어 위력을 떨쳤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이런 질병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특히 1850년에 처음으로 하와이에서 발견된 후 급속하게 퍼지던 나병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더했다. 1863년 하와이 정부의 추정에 의하면, 아시아 이민자들이나 포경선 선원에 의해 전파된 것이 틀림없는 나병균으로 하와이 인구의 10-15%가 감염되었다. 그리하여 1790년에 50만 명에 달했던 인구가 1865년에는 겨우 5만 명으로 떨어졌다. 급기야 그해에 하와이 국왕은 칙령을 반포했다. 나병 감염이 의심되는 모든 사람은 신설된 보건국의 검진을 받을 것이며, 치유가 불가능한 환자는 몰로카이 섬의 정착촌으로 이주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치료제가 없었기에 국왕은 모든 국민을 검진하여 나병이 확진된 사람을 몰로카이 섬으로 강제로 격리시켰다. 그 과정에서 격렬한 반대와 저항과 폭력과 눈물과 맞서야 함은 당연했다. 갑작스럽게 또한 강제로 가족이나 친지와 생이별을 해야 했으니 지켜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몰로카이의 영웅"
몰로카이 섬은 하와이 군도의 중앙에 있다. 기다란 직사각형인 이 섬의 북쪽 해변에는 작고 경사진 칼라우파파 반도가 있고 이 반도의 동쪽 끝에는 600-900m의 높은 절벽에 의해 햇볕이 차단되어 춥고 비가 자주 오는 칼라와오가 있다. 나환자들이 추방된 곳이 바로 칼라와오였다. 그곳은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탈출은 불가능했으며, 햇볕은 물론 세상과도 완전히 차단된 지역이었다.
옷과 식량을 제공하겠다는 당국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 10년간 그곳 나환우들의 삶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으며 그 실상은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사람들은 그곳을 이렇게 칭했다. “그곳에 법은 없다. 몰로카이의 주인은 죽음이다.”
한편 1873년 부활 시기에 마우이 섬에서 새 성당 축성미사가 있었다. 미사 후 메그레 주교는 신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칼라와오 나환자촌에 신부를 보내야 하지만 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러면서 그는, 하와이에 있는 사제 네 명이 3개월씩 번갈아 나환자 정착촌에서 봉사하는 게 어떻겠는지 물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신부들 모두 영구히 상주하겠다며 자청하고 나섰지만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미안 신부가 먼저 3개월 동안 봉사하기로 했다.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입던 옷 그대로 기도서 한 권만 달랑 들고서 서둘러 몰로카이 섬으로 떠났다.
1873년 5월 8일 칼라와오에 도착한 다미안 신부는 첫날밤에 돌을 베개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머물 곳이 없어 며칠을 나무 아래에서 보냈다. 칼라와오는 그야말로 지상의 지옥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처음 수용된 이들 중 40%가 영양실조로 죽은 뒤였다. 그만큼 먹을 것이 없었고, 주거지도 오두막이나 나무 밑이 전부였으며, 각종 범죄가 들끓고 있는 무법천지였다. 더욱이 치료라곤 받아본 적이 없어 온몸이 문드러지고 피고름이 고인 상처엔 벌레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는 나환우들의 모습도 비참함을 더했다.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지르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다.
그는 도착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된 5월 10일에 호놀룰루의 수도회 장상에게 편지를 썼다. 3개월 기한으로 왔지만 계속 상주할 수 있기를 청했다. “사제 한 사람이 계속 머물러 있을 필요가 절실합니다. … 제 삶을 기꺼이 나환우들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5월말에 하와이의 지방 신문들이 다미안 신부를 “몰로카이의 영웅”이라 칭하며 그에 관한 기사를 저마다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다미안 신부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고 언론이 떠드니 정부에서도 물품과 사람의 지원을 등한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도회에서도 다미안 신부의 상주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36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
800여 명의 나환우가 수용된 몰로카이의 칼라와오에서 유일한 백인이며, 유일한 건강인은 33세의 다미안 신부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사제의 직무는 물론이요 건축가, 목수, 의사, 약사, 간호사, 농부, 변호사, 경찰, 은행가, 부동산 중개인, 무덤 파는 인부, 관 제작자 등등으로 그는 “36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통나무처럼 단단하고 벌어진 가슴을 지닌 타고난 건강 체질인데다 성격도 시원스런 그는 초인적인 활동으로 다섯 곳에 성당을 짓고, 선교를 하고,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치료실을 마련하고, 하수 처리시설을 건설하였다. 날마다 환우들을 찾아다니며 약을 주고 고름을 짜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틀 내지 사흘에 한 명씩, 1년에 150-200명씩 죽어갔으니 관을 짜서 장례를 치르고 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새 환우가 속속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가 도착했을 당시에 환우들 대부분이 축축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풀로 얼기설기 엮어졌고 분뇨로 질퍽거리는 움막에서 살고 있었는데 “불굴의 목수” 다미안 신부의 노력에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당시에 어느 의사가 보건국에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300여 채의 집이 세워졌고 거의 모두가 백색 회칠이 되어 있으며 매우 깨끗하고 정결하다. … 모든 점에서 과거보다 상당히 나아졌다. … 환자들의 증상도 무척 호전되었다. 이는 거의 주거 시설의 개선 덕택이다.”
첫 이주 후 13년만인 1878년에 처음으로 의사가 그곳을 방문할 때까지 그는 증세가 비교적 덜한 이들과 함께 나환우들을 돌보았다. 특히 어느 방문객이 “인간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라고 했던 어린 환우들을 보살필 때 다미안 신부의 모습은 마치 꽃을 다루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환우들이 재배한 토란 요리를 함께 먹고, 피고름이 나는 손으로 집어주는 돼지고기를 받아먹었으며, 자신의 사제관을 완성한 후에는 모든 환우들에게 개방했을 뿐 아니라 환우 한 명을 식복사로 두기도 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냉담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던 그들이지만 꽁꽁 닫아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차츰 그에게 열어 보이며 그를 신뢰하고 존경하며 따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는 버림을 받았지만 다미안 신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그들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사랑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예수님은 이 나환우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렸다.”라는 그의 말은 그가 몰로카이에서 16년을 보낸 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초인적인 활동을 가능케 한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다미안 신부의 끝없는 사랑과 희생은 몰로카이 나환우들만 감동시킨 게 아니었다. 그의 활동과 열매는 바다 너머 세상에도 전해졌다. 그리하여 세계 전역의 교회와 개인의 후원과 관심이 연이어졌고, 하와이 정부도 다미안 신부가 몰로카이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시키고 또한 아무도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했던 조처를 풀었다. 더욱이 1881년 하와이 정부는 다미안 신부에게 ‘카라카우아’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공로를 기렸다.
"우리 나환우"
다미안 신부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환우들의 고통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다. “주님, 제게도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주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1885년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그는 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했는데 평소와는 다른 피로를 느껴 목욕으로 풀려고 물을 끓였다. 그리고 실수로 뜨거운 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에 쏟은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 덴 자리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었다.
마침내 그도 나병 판정을 받았다. 나병의 잠복기가 거의 10년으로 볼 때 이미 오래 전에 감염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내적 평화와 기도와 외적 활동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저도 나환자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나환우”라는 표현을 애용했으며, “우리 나환우”를 돌보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1886년이 되자 손과 팔은 심하게 부어올랐고, 이마엔 혹이 나고 얼굴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사 중에 쓰러졌다.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그는 말했다.
“저 자신은 건강을 잃어버렸지만, 하느님께서는 나환우들 틈에서 일하는 제 선교의 열매를 더욱 풍부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희생을 내려주셨으니, 저의 이 희생은 극히 작은 것이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는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저도 나환자가 됐습니다.">
1889년 4월 15일 오전 8시, 예수 부활 대축일 전 월요일, 다미안 신부는 이 세상에서의 49년의 삶을, 몰로카이에서의 16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는 성 필로메나 성당 바로 옆에, 그가 칼라와오에 도착하여 첫밤을 보냈던 그 나무 아래에, 2000명의 나환우들이 묻혀 있는 바로 그 가운데에, 죽어서도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며 몇 년 전에 자신이 손수 조성한 그곳에 묻혔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수도서원을 갱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지상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한 부활절을 경축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으로 봉사할 수 있었으니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생전에도 그는 자신을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
1893년, 몰로카이 섬에는 다미안 신부를 기리는 의미로 ‘다미안가(街)’가 생겼고,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2)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그 거리에 세워졌다. 1894년 다미안 신부의 모국인 벨기에의 루뱅에 있는 성 야고보 성당 광장에는 다미안 신부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1936년 그의 유해는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 루뱅의 성 요셉 성당으로 옮겨져 지하에 안치되었다. 묘비는 지금도 몰로카이에 그대로 있다. 하와이 주정부 청사에도 다미안 신부의 동상이 있다.
1995년 6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였던 다미안 신부를 복자의 품위에 올렸다. 2005년 벨기에는 다미안 신부를 “벨기에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했다.
한편 마더 데레사는 생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할 때마다, “다미안 신부의 삶 자체가 바로 기적입니다.” 하며 기적 심사를 관면하고 복자 다미안 신부를 시성해주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 역시도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몹시 원하면서도 서둘러 시성하여 그에게 “하급 성인”의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여겼다. 교황은 “문제는 기적입니다.” 하며 다미안 신부의 전구를 통한 기적을 기다렸다 한다.
그런데 드디어 천상에서 응답이 도착했다. 하와이에 사는 은퇴 여교사 오드리 토구치는 치유 불가능한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아 시한부 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미안 신부에게 전구 기도를 바친 뒤 의학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았다. 2008년 교회는 그것이 “의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최종 결론을 얻었다. 다미안 신부를 기리는 모든 이가 기다리던 바로 그 “기적”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다미안 신부를 “인간의 이해와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 희생과 하느님에 대한 소명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하며 성인으로 선포했다(축일 4월 15일). 또한 몰로카이의 성자 다미안 성인은 나병은 물론이요 희귀 난치병을 앓는 이들, 버려진 아기들, 억압받는 여성들, 차별받는 소수 공동체 등의 소외당한 모든 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으로 봉사할 수 있었으니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몰로카이에 있는 묘비.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었다"(요한15,12).>
다미안신부의 사진과 글의 원본은 인터넷 http://sihm.or.kr 에서 아베마리아 출판사 가톨릭정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