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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07 00:00
선풍기 이야기(펀글)
 글쓴이 : 가로등
조회 : 12,903  
하늘나라에 선풍기가 한 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신나게 바람을 만들었어요. 길 가는 사람들이 선풍기 앞에 서서 어허 시원하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욕심이 생겼지요.

선풍기는 여름 한철밖에 소용이 없어. 나머지 세 철엔 하릴없이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어야 해.

난 노래하는 선풍기가 되고 싶어. 춤추는 선풍기도 되고 싶고. 그래 그래, 난 요리하는 선풍기도 될 거야. 책을 읽어주는 선풍기도 좋지. 으흠, 사랑에 빠진 선풍기는 또 어떻고….

그래서 선풍기는 하느님을 찾아갔지요.

"나는 십 년 동안 바람을 만들었어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 일이 싫어졌어요.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내 능력이 이것뿐인가, 탄식하기도 해요. 바람을 만드는 일만 말고는 모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구요. 알겠어요?"

선풍기의 얘기를 다 듣고 하느님께서는 선풍기의 등을 토닥거려주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부러울 때가 있지. 자신이 지닐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아플 때도 있고. 십 년 동안이나 같은 일을 했으니…."

하느님께서는 선풍기의 꿈을 들어주셨습니다.

분수가 있는 넓은 정원에서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선풍기의 앞에 멋진 정원이 펼쳐지고 분수의 물길이 솟아올랐습니다. 분수의 물길에 따라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와 같은 왈츠 음악이 선풍기의 몸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선풍기는 신났습니다.

어느 날은 시원한 포도넝쿨 아래서 동화책을 주전주전 읽기도 하였지요. 해리 포터도 읽어주고 린드그렌 할머니의 동화랑 권정생 할아버지의 동화도 읽어주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모여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어떤 아이는 수줍게 초콜릿을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선풍기는 신났습니다.

어느 날은 된장국 냄새를 솔솔 풍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집시 아가씨의 뒤를 쫓아다니기도 하다가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 그런 선풍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술 선풍기군. 일찍이 저런 선풍기를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은 이내 주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구나무를 서보렴."

"이 빵으로 계란을 만들어봐."

"이 장미꽃을 저기 저 이층 창문에 걸어줘."

"이 수학 문제를 좀 풀어봐."

"내 대신 학교에 가 줘."

"더 신나는 춤을 출 수 없니?"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화장실의 약도를 그려줘."

사람들의 주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선풍기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 부탁을 하면 또 다른 사람이 이 요구를 하고 그러다가는 짜증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것도 못해."

"그렇게 느려터져서야 원…."

선풍기는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요구도 분명하게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렵사리 요구를 들어준 날도 가슴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선풍기는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풍기는 옛날이 그리워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신나는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 재미없어졌습니다. 구수한 감자튀김 냄새를 풍기는 일도, 물구나무를 서거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도 다 시시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선풍기는 길 한 모퉁이에 멍청히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선풍기의 모습을 보고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이 피에로 선풍기야, 뭔가 계속 신나는 일을 하란 말이야."

하면서 발로 뻥 찼습니다. 선풍기의 몸은 하마터면 두 동강이 날 뻔했습니다.

선풍기는 울면서 하느님을 찾아갔습니다. 하느님이 선풍기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하찮고 못났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지닌 존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농부는 과수원을 가꾸고, 천문학자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화가는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열심히 그리고… 선풍기는 자신의 바람을 만들어낼 때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법이지."

선풍기는 옛날처럼 다시 바람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선풍기는 행복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어느 날 내게 물어왔습니다.

"아빠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나는 순간 이 질문이 굉장히 난해한 질문이란 걸 알았습니다. 아이는, 글을 쓰는 자신의 아비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태어나서 처음 묻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흘쯤 시간을 주련? 그때 이야기해주마."

사흘의 말미를 얻어놓고 나는 끙끙 앓았습니다.

도대체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야 책상 앞에 놓인 고물 선풍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십 년 넘게 바람을 만들어온 선풍기의 이야기. 궁색한 답변을 만들어놓고, 면접위원 앞으로 가는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나는 아이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필자 소개>

곽재구님의 시 '사평역에서'는 모든 문학 지망생들이 공통적으로 아끼는 작품이다. 광주와 섬진강 가에 자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시 쓰고, 동화도 짓는 님은, 올해 들어 조금 색다른 삶을 시작하셨다. 순천대 문예창작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 그러나 느릿느릿함과 동시에 또박또박 발음하는 특유의 목소리로 님은 말씀하신다. "절대로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세상에 '선생님'처럼 듣기 좋은 호칭도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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